계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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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계양군 시호 충소공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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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在京畿道楊州郡渼金面一牌里安谷後山辛坐之原圓墳具碑石床石長明燈文石將軍石望柱石階틘石一層墓前有道安君縣夫人合墓戌坐右一麓有文川正愼夫人合墓乾坐左一麓有寧源君平昌郡夫人雙墳艮坐又其上有龍岡公淑夫人雙墳戌坐

西京城東大門三十里東金谷洪陵裕陵五里南德沼驛十五里西北間陶農驛十里西東九陵望月嶺十五里

 

桂陽君別廟未遑子孫之齎恨久矣歲庚子重修派譜以同年鳩聚餘財辛丑二月一日定基于楊州郡渼金面一牌里六六一番地垈同年七月二十六日忌辰奉安禮成

 

묘소는 경기조 양주군 미금면 일패리 안곡후산 신좌의 언덕에 있으니 둥근 봉분에 비석 상석 장명등 문석 장군석 망주석 계체석 一층을 갖추었다. 묘전에 도안군 현부인 합묘가 술좌에 있고 또한 기슭에 문천정 신부인 합묘가 건좌에 있으며 한 기슭에는 영원군 평창군 부인 쌍분이 간좌에 있고 또 그 위에 용강공 숙부인 쌍분이 술좌에 있다.

 

서쪽으로 동대문 三十리 동쪽으로 금곡 홍릉 유릉 五리 남으로 덕소역 十五리 서북간으로 도농역 서쪽으로 동구릉 망월령 十五리이다.

 

계양군의 사당을 모시지 못하여 자손의 한이 된 지 오래더니 경자년에 파보를 중수하고 동년에 남은 재산을 모아 신축 二월 一일 양주군 미금면 일패리 六六一번지 대에 터를 정하고 동년 七월 二十六일 기일에 봉안례가 이루어졌다.

 

mark.png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 계양군 증시 충소공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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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귀字顯之愼嬪金氏出也金氏少時選入內侍世宗大王甚寵生六子公其長 也仍封爲君曰桂陽今 上之卽位也與有功 賜佐翼功臣號公之同産皆賢而

上之尤所親愛者惟公一人而己公亦自以特荷知遇愈恭殼竭節盡忠翼翼不少 懈天順八年正月흗疾特 遣內醫賜藥餌竟不效越八月丙申卒壽三十八訃聞 上慟悼輟膳停朝市三日賻贈有加諡曰忠昭公以成化元年二月壬寅물于楊州 治東論谷之原禮也娶議政府左議政韓確之女生三男三女長曰p007.png封寧源君次 曰瀜封江陽君餘皆幼公天資溫雅뀌性英邁雖長綺紈雅好詩書自爲돼稚克敦 忠孝夙夜匪懈媚于一人當世之稱宗室雅望者莫不以公爲首嗚呼如是而不壽 天也銘可己耶銘曰

 

孝友忠貞惟德之厚英明文雅實罕厥偶手扶曰p004.png一節左右之貴之富分固宜有令聞令望宗英之首天胡不仁乃嗇其壽玉樹其p005.png名應不p006.png托玆貞珉庶昭 悠久

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崇祿大夫行吏曹判書兼知經筵事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達城君 徐居正 撰

 

공의 휘는 증이요 자는 현지이니 신빈 김씨가 낳으셨다.김씨가 어렸을 때에 뽑혀 궁중에 들어가셔 세종대왕이 심히 총애하사 아드님 여섯을 낳으셨으니 공은 그 맏이다. 봉군을 계양이라 하며 지금의 임금이 즉위할 적에 공로가 있어 좌익공신의 호를 주었고 공의 형제가 다 어질었으나 임금의 친애함이 더욱 두터운 분은 오직 공뿐이었으니 공도 또한 임금의 인정을 받아 후한 대접에 감사하여 더욱 공손하고 공경하며 충절을 다하고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천순 八년 정월에 병환이 나셨을 때 왕이 특별히 의원과 약을 보내어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어 八월 十五일(丙申)에 돌아가시니 수가 三十八세였다. 부음을 듣고 임금이 심히 슬퍼하사 조회와 시장을 三일간 철폐하고 부조를 많이 내리고 시호는 충소이며 성화 원년 二월 임인에 양주군 동쪽 는곡의 언덕에 예장하였다.

 

의정부 좌의정 한확의 따님을 맞아 三남 三녀를 낳으셨으니 맏은 풍이니 영원군이요 다음은 융이니 강양군이며 나머지는 다 어리다.공은 천성이 온화하고 품성이 영민하고 비범하여 비록 귀족으로 생장하였으나 항상 시서를 좋아하고 어려서부터 충효를 두텁게 하며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임금만을 따르니 그 당시 종실에서 중망이 있는 분은 공이 으뜸이었다.

아! 이와 같으나 수를 못한 것은 천명이니 명하지 않을쏘냐. 명하노니

 

효우와 충정은 오직 덕이 두터웠기 때문이요 영명한 것과 문장이 아담함은 그 짝할 이 드물었다. 손으로 붙잡은 것은 임금님의 수레요 그 좌우에서 한결같은 충절이었네. 귀하고 부하나 분수를 지키고 아름다운 성명과 중망은 종실의 우두머리였네. 하늘이 어찌 어진 마음 없어 그 수를 인색하게 하였나. 아름다운 나무가 꺾이었으나 그 이름만은 응당 없어지지 않으리라. 여기에 새겨 영원토록 빛나게 하리라.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숭록대부 행이조판서 겸 지경연사 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달성군 서거정이 지음.

 

 

mark.png 계양군 시호 충소공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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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在京畿道楊州郡渼金面一牌里安谷後山辛坐之原圓墳具碑石床石長明燈文石將軍石望柱石階틘石一層墓前有道安君縣夫人合墓戌坐右一麓有文川正愼夫人合墓乾坐左一麓有寧源君平昌郡夫人雙墳艮坐又其上有龍岡公淑夫人雙墳戌坐

西京城東大門三十里東金谷洪陵裕陵五里南德沼驛十五里西北間陶農驛十里西東九陵望月嶺十五里

 

桂陽君別廟未遑子孫之齎恨久矣歲庚子重修派譜以同年鳩聚餘財辛丑二月一日定基于楊州郡渼金面一牌里六六一番地垈同年七月二十六日忌辰奉安禮成

 

묘소는 경기조 양주군 미금면 일패리 안곡후산 신좌의 언덕에 있으니 둥근 봉분에 비석 상석 장명등 문석 장군석 망주석 계체석 一층을 갖추었다. 묘전에 도안군 현부인 합묘가 술좌에 있고 또한 기슭에 문천정 신부인 합묘가 건좌에 있으며 한 기슭에는 영원군 평창군 부인 쌍분이 간좌에 있고 또 그 위에 용강공 숙부인 쌍분이 술좌에 있다.

 

서쪽으로 동대문 三十리 동쪽으로 금곡 홍릉 유릉 五리 남으로 덕소역 十五리 서북간으로 도농역 서쪽으로 동구릉 망월령 十五리이다.

 

계양군의 사당을 모시지 못하여 자손의 한이 된 지 오래더니 경자년에 파보를 중수하고 동년에 남은 재산을 모아 신축 二월 一일 양주군 미금면 일패리 六六一번지 대에 터를 정하고 동년 七월 二十六일 기일에 봉안례가 이루어졌다.

 

mark.png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 계양군 증시 충소공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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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귀字顯之愼嬪金氏出也金氏少時選入內侍世宗大王甚寵生六子公其長 也仍封爲君曰桂陽今 上之卽位也與有功 賜佐翼功臣號公之同産皆賢而

上之尤所親愛者惟公一人而己公亦自以特荷知遇愈恭殼竭節盡忠翼翼不少 懈天順八年正月흗疾特 遣內醫賜藥餌竟不效越八月丙申卒壽三十八訃聞 上慟悼輟膳停朝市三日賻贈有加諡曰忠昭公以成化元年二月壬寅물于楊州 治東論谷之原禮也娶議政府左議政韓確之女生三男三女長曰p007.png封寧源君次 曰瀜封江陽君餘皆幼公天資溫雅뀌性英邁雖長綺紈雅好詩書自爲돼稚克敦 忠孝夙夜匪懈媚于一人當世之稱宗室雅望者莫不以公爲首嗚呼如是而不壽 天也銘可己耶銘曰

 

孝友忠貞惟德之厚英明文雅實罕厥偶手扶曰p004.png一節左右之貴之富分固宜有令聞令望宗英之首天胡不仁乃嗇其壽玉樹其p005.png名應不p006.png托玆貞珉庶昭 悠久

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崇祿大夫行吏曹判書兼知經筵事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達城君 徐居正 撰

 

공의 휘는 증이요 자는 현지이니 신빈 김씨가 낳으셨다.김씨가 어렸을 때에 뽑혀 궁중에 들어가셔 세종대왕이 심히 총애하사 아드님 여섯을 낳으셨으니 공은 그 맏이다. 봉군을 계양이라 하며 지금의 임금이 즉위할 적에 공로가 있어 좌익공신의 호를 주었고 공의 형제가 다 어질었으나 임금의 친애함이 더욱 두터운 분은 오직 공뿐이었으니 공도 또한 임금의 인정을 받아 후한 대접에 감사하여 더욱 공손하고 공경하며 충절을 다하고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천순 八년 정월에 병환이 나셨을 때 왕이 특별히 의원과 약을 보내어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어 八월 十五일(丙申)에 돌아가시니 수가 三十八세였다. 부음을 듣고 임금이 심히 슬퍼하사 조회와 시장을 三일간 철폐하고 부조를 많이 내리고 시호는 충소이며 성화 원년 二월 임인에 양주군 동쪽 는곡의 언덕에 예장하였다.

 

의정부 좌의정 한확의 따님을 맞아 三남 三녀를 낳으셨으니 맏은 풍이니 영원군이요 다음은 융이니 강양군이며 나머지는 다 어리다.공은 천성이 온화하고 품성이 영민하고 비범하여 비록 귀족으로 생장하였으나 항상 시서를 좋아하고 어려서부터 충효를 두텁게 하며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임금만을 따르니 그 당시 종실에서 중망이 있는 분은 공이 으뜸이었다.

아! 이와 같으나 수를 못한 것은 천명이니 명하지 않을쏘냐. 명하노니

 

효우와 충정은 오직 덕이 두터웠기 때문이요 영명한 것과 문장이 아담함은 그 짝할 이 드물었다. 손으로 붙잡은 것은 임금님의 수레요 그 좌우에서 한결같은 충절이었네. 귀하고 부하나 분수를 지키고 아름다운 성명과 중망은 종실의 우두머리였네. 하늘이 어찌 어진 마음 없어 그 수를 인색하게 하였나. 아름다운 나무가 꺾이었으나 그 이름만은 응당 없어지지 않으리라. 여기에 새겨 영원토록 빛나게 하리라.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숭록대부 행이조판서 겸 지경연사 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달성군 서거정이 지음.